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만 왕조 (문단 편집) == 몰락 == 사만 왕조가 운영하던 광산 유적에는 족쇄들이 상당히 많이 발견되는데, 이는 광산에 노예 노동을 이용했음을 보여준다. 사만 왕조는 튀르크 스텝 지대로 노예 모집 원정대를 보내어 튀르크 노예들을 잡아다가 군인이나 광부로 착취했는데, 결국에는 로마 제국이 자신들에게 노예를 공급하던 게르만족들에게 서서히 무너졌던 것처럼 사만 왕조 역시 튀르크인들에게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사만 왕조의 군대가 로마군처럼 주변 이민족들에 비해 특별히 기량이나 전술이 우수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대신 사만 왕조는 이웃 튀르크계 유목민 왕조들의 내분을 활용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이를테면 사만 왕조는 튀르크계 [[카라한 왕조]] 중 약한 쪽을 이용하여 강한 쪽과 싸우게 만들고 이를 지원하면서 그 대가로 튀르크인 포로를 얻었다. 그러나 주변 튀르크계 부족들이 하나 둘씩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카라한 왕조]]나 [[가즈니 왕조]]를 중심으로 뭉치자 사만 왕조는 급격히 위축되기 시작했다. 암살당한 아흐마드 이븐 이스마일 사마니의 아들은 어린 '''[[나스르 이븐 아흐마드]]'''로써 '''나스르 2세'''로 불리는데 아버지가 죽고, 고작 8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게 되어 사만 왕조는 한동안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급격하게 성장한 제국의 내부적인 문제로 인하여, 그리고 나스르 2세가 기존의 [[수니파]] 이슬람을 버리고, [[시아파]] 이슬람으로 개종한 연유로 인해 나스르 2세는 거의 생애 내내 이에 반발하는 제국 내부의 총독, 복속된 토후들의 반란을 진압하러 다녀야 했다. 이러한 계속된 내전으로 인해 나스르 2세의 아들 '''[[누흐 이븐 나스르]]'''[* 통칭 '''누흐 1세'''.]가 통치하는 시기에 이르러서는 사만 왕조 내부의 튀르크계 출신 병력의 비중이 상당히 높아졌는데 이 튀르크계 병력들을 지휘하는 튀르크인 지휘관들은 사만 왕조가 점차 쇠락하는 틈을 타 각지에서 반쯤 독립적인(형식적으로만 사만 왕조에 충성하는) 세력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 중 한 명이 [[가즈나 왕조]]의 실질적인 시조인 [[사부크티긴]]이었다. 그러나 그 때까지는 사부크티긴의 가즈나 튀르크 군벌들이나 [[오우즈]] 튀르크 군벌들이 사만 왕조의 군주에게 여전히 충성했으나 당나라의 [[황소의 난]]에 빗댈만한 '파이크의 반란'이 터지고, 호라즘 총독과 파이크 등의 세력들이 제국을 혼란으로 몰고 가자, 당시 새로이 떠오르던 신생 이란계 왕조인 [[부와이 왕조]]가 사만 왕조를 공격하여 타바리스탄과 이란 등지를 빼앗아버림으로써 사만 왕조는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